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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일본에서 「둔감력」이 주목받는 이유는? (feat. 유토리 세대)

 

목차
1. '둔감력'이란?
2. 선택적 둔감력
3. 왜 '둔감력'이 주목받을까? (feat. 유토리세대)



약 15년 전 부터 일본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둔감력"입니다.

「둔감력」이라는 단어는,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2007년 낸 에세이의 제목입니다. 이 책은 출판하자마자 불티나게 팔리면서 현재까지 100만 부 돌파라는 기록적인 수치를 달성하고, 2007년 '일본 올해의 유행어'에 선정되기도 했죠.

이 책은 한국에서도 『둔감력』 이라는 같은 제목으로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2707368

 

둔감력 - YES24

나쁜 일은 바로 잊어버리는 사람, 설교는 한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 언제 어디서라도 잠을 잘 자는 사람,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는 대식가….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둔감력을 가졌다는 것. 세상

www.yes24.com



그토록 사람들이 열광하는 '둔감력'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정의하면,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내 길을 간다 정신'입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혼나거나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금방 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누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한다고 해도, 그것에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는 사람,
사소한 걱정에 괴로워하지 않고 잠도 잘 자고 뭐든 잘 먹고 잘 소화하는 사람,
일희일비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맷집 좋게 나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 '둔감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둔감력에 대해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지지율 하락으로 고뇌하고 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에게 선임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두 차례에 걸쳐 “신경 쓸 필요 없다. 둔감력이 중요하다(安倍首相は、もっと鈍感力を持て)”고 격려했습니다. 당장의 지지율 하락에 신경쓰지 말고, 장기적인 정책 목표를 향해 달려가라는 뜻이었겠죠.

이처럼 "둔감력"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사회적 용어로서 자리잡은 듯 합니다.


 

● '선택적' 둔감력



'둔감하다'는 것은 원래, 감각이나 반응이 느리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주변에 무슨 일이 발생해도 잘 눈치채지 못한다든지, 상대방이 말한 것에 대해 재빠르게 반응하지 못한다든지 하는 상황에서 둔감하다는 말을 씁니다.

이 책에서 권하는 '둔감하다'는 이럴 때 쓰는 둔감함은 아닌 듯 합니다.

저자는 '내 인생에 있어서의 역경, 장애물에 대해 둔감하라'고 조언합니다. 실수를 하건, 상사에게 혼나건, 큰 손해를 입건,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주는 일'에 대해 둔감력을 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 쯤이야!"라고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강한 멘탈을 기르라는 것이죠.

그것이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폭발하기 쉬운 이 시대'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이라구요.

마치 『미움받을 용기』에서 워딩만 바꾼 책인 것 같기도 하네요.



● 왜 『둔감력』이 주목받을까? (feat. 유토리 세대)



"둔감력"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자리에 올랐는데요. 이건 그만큼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둔감력"이 필요하다는 방증이겠죠.

이 책이 출판된 2007년은 일본의 "유토리 교육"과 이로 파생된 "유토리 세대"가 문제가 되었던 시기입니다.



유토리 교육(ゆとり教育)이란 무엇일까요?

일본어의 잔재이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유도리가 없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즉슨, "융통성이 없다"는 뜻이죠. "유도리"는 여유, 융통성을 뜻하는 일본어 "유토리(ゆとり)"에서 온 단어입니다.

유토리 교육이란,

대학만 바라보고 죽어라 공부하는 입시 위주 교육에서 벗어나서, 주체성과 개성, 응용력을 가진 아이들로 키우자는 것입니다. 즉, 남보다 더 잘하기 위해 경쟁하는 교육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탤련트를 키우자는 목표를 가지고 만들어진 교육 정책입니다. 유토리 교육은 1976년부터 단계적으로 도입되어 2002년부터 공교육에서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표현력, 사고력, 배려심 등을 배양하기 위한 '종합학습시간'이 제정되었고, 학습량이나 학습시간이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초,중학교의 교과 내용은 30%가 감소하고, 전체 수업 시간은 10%가 감소되었죠.

그러나 이 유토리 교육은 얼마 가지 않아 엄청난 부작용들을 생산해내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학 력 저 하"


학습량과 학습시간이 줄어들면서 학력 저하라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OECD에서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과 지식을 측정하는 PISA(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 지표가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 학생들의 국제학력테스트 순위가 급격하게 하락했다.



"공교육 안에서는 우리 애가 멍청해진다! 좋은 대학에 못 보낼지도 모른다!"

라는 불안감과 공포가 퍼지면서, 사립학교에 학생이 몰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교육 양극화가 극심해집니다. (*일본의 사립학교는 국공립에 비해 학비가 매우 비싸기 때문에,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들만 보낼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아무리 좋은 의도로 "유토리 교육"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는 일본의 사회 구조와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이었습니다. 일본, 한국, 중국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인구밀도가 굉장히 높기 때문에, 그야말로 '사람이 힘'인 사회입니다. 바꿔 말하면,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는 뜻입니다. 남보다 잘해야 눈에 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구조를 무시하고, '개개인에 맞춘 여유로운 교육'을 도입하니 엄청난 반발과 부작용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회적 카오스 상태가 되자, 충격 받은 일본 정부는 2011년, 유토리 교육을 전면적으로 폐지합니다.


유토리 교육은 사라졌지만, 십 수년간 이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유토리 세대"라고 부릅니다.

"유토리 세대"라고 칭할 때, 그다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제대로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한 주체성 없고 멘탈 약한 세대들이라는 이미지가 있죠.

경쟁에 흥미가 없다 (지금보다 더 잘하려는 의욕이 부족하다)
자주성이 없다 (일을 세세하게 하나하나 지시하지 않으면 모른다)
멘탈이 약하다



이런게 유토리 세대들의 특징으로 일컬어지는 항목들입니다.

경쟁을 해본 적도, 싫은 소리를 들어본 적도 별로 없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혼낸다거나, 비난한다거나, 혹은 내가 저지른 실수로 인해 어떤 일이 틀어지면 엄청난 상처를 받고 좌절하게 되는 것이죠.

때문에 이 세대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와타나베 준이치가 주창했던 "둔감력"인 것입니다.

둔감력을 바꿔 말하면, "난 내 길을 간다 정신"이라고 했죠?

와타나베 준이치씨는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너무 자주 상처받는 요즘 세대들을 지켜보면서,
"얘들아, 그런 세세한 일에 고뇌하고 좌절하는건 너희 스스로한테 도움 될 것 하나 없어. 정신차려!"라고 이야기하며 "둔감력"이라는 단어를 꺼냅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미움받을 용기"도 비슷한 결의 책이죠.


'베스트셀러' 안에는 책 자체가 훌륭한 경우도 있지만,
그 시대의 인간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책이 많다고 생각해요.

이 '둔감력'도 후자의 경우,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가려운 부분을 잘 공략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약한 멘탈'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된 것이 비단 일본만의 문제라고는 보기 힘듭니다.

한국에서도 '미움받을 용기'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그 이후로도 한참 '힐링' '위로' '자존감' 관련 책들이 쏟아졌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요.

MZ세대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면, 요즘 젊은 세대는 '자주성', '주체성', '개성'을 가지고 있는 인재들이라는 극찬도 있지만, 정반대로 '위기나 역경을 맞았을 때 쉽게 좌절하는 약한 멘탈을 가지고 있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둔감력'이 필요한 현 세대들의 특성은
'유토리 교육' 탓만이 아닌, 민주주의의 발달, 자녀수 감소 및 학생 수 감소, 개인주의의 발달 등 시대적 흐름에 따라 생겨나게 된 특성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

 


아무쪼록, '둔감력'을 가져서 나쁠 건 없으니
둔감력을 키워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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